왜, 법정에서 정의가 부정되는가?소크라테스와 정의의 여신 디케의 대화: “법정에서 정의가 죽을 때”
1부. 나는 독배를 받았다
소크라테스: 오, 디케여.
나는 2,400년 전 아테네의 법정에서,
내가 사랑하던 도시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소.
내가 한 일이라곤 질문이었고,
그들이 증오한 건 대답이 아니라 내가 만든 '생각'이었소.
나는 그날 진리를 말했지만, 그들은 그것을 모독이라 했소.
그 판결이 과연 정의였소?
디케: 아니오.
그 판결은 민주주의가 철학을 두려워한 순간이었소.
당신이 범한 죄는 없었고,
다만 그 시대가 진실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오.
정의는 그날 법정에 출석하지 못했소.
2부. 법의 탈을 쓴 부정한 판결들
소크라테스: 그럼 나는 하나 더 물어야겠소.
19세기 프랑스, 드레퓌스라는 유대인 장교는 조작된 증거로 종신 유배형을 받았고,
그 진실을 외친 사람들은 “국가 모욕죄”로 기소되었지.
정의는 언제부터 국가 체면보다 하위 개념이 되었소?
디케: 그때 프랑스는 법을 방패로 삼아 체면을 방어했고,
진실을 위험물로 간주했소.
그 재판은 법의 절차는 지켰으나, 진실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판결이었소.
정의는 침묵했고, 국가만 말했소.
소크라테스: 또 하나 있소.
1974년, 미국 남부에서 조앤 리틀이라는 흑인 여성이
성폭행에 맞서 백인 교도관을 죽이고도 사형을 구형받았소.
자기를 지킨 사람이 어찌 죽음을 받아야 하오?
그 판결은 법이 아니라 피부색의 판결이었소.
디케: 맞소.
그 법정엔 인권이 없었고, 오직 구조적 차별이 있었소.
법이 흑인 여성에게 자기 방어권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시절,
정의는 법정에 입장조차 하지 못했소.
3부. 대한민국, 오늘 내려진 판결
소크라테스: 그렇다면 나는 오늘을 물을 수밖에 없소.
2025년 5월, 대한민국 대법원은 이재명이라는 정치인을
‘선거법 위반’ 혐의로 유죄라 하였소.
허나 내가 보기에, 그 재판은 이미 검찰의 기소 순간부터 기울어 있었소.
그대, 오늘 그 판결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겠소?
디케: 나는 신이기에 재판문을 쓰지는 않소.
그러나 나는 흐름을 읽소.
이 사건은 진실 규명이 아닌,
정적 제거를 위한 기획 수사였소.
검찰은 권력의 그림자를 등에 업고 기소했으며,
사법부는 그 무게에 휘청였소.
결과는 유죄였지만, 정의는 아니었소.
소크라테스: 무죄에서 유죄로 뒤집힌 판결.
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소?
법률 해석의 변화인가?
아니면 판사들의 용기의 부재인가?
디케: 그 사이엔 정치적 기획이 있었소.
그건 법리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방향이오.
정의는 그렇게 미끄러졌소.
검찰이 기소했고, 법원이 판단했지만,
실상은 정치가 재판한 셈이었소.
4부. 정의를 법정에 다시 불러들이려면
소크라테스: 정의가 빠진 재판이 반복되고 있소.
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오?
법을 바꿔야 하나, 판사를 바꿔야 하나,
아니면 인간 스스로를 바꿔야 하오?
디케: 셋 모두가 필요하오.
그러나 먼저는,
시민이 정의를 구경하는 존재에서
참여하고 감시하고 질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오.
정의는 법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
광장에서, 투표장에서, 일상에서 숨 쉬는 것이오.
소크라테스: 그렇다면 나도 다시 질문을 던져야겠군.
‘정의는 무엇인가’
이 질문은 2,400년 전에도 나를 죽였고,
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선 사라지고 있소.
그 질문을 우리가 멈춘 날, 정의는 사라질 것이오.
디케: 그러니, 질문하라.
그리고 그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민들이 있는 한,
정의는 언젠가 다시 법정에 출석할 것이오.